익명 풍경 Anonymous Scenes

김인우_작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누군가가 있다. 그 계단을 올라가는 누군가가 있다. 둘은 계단의 어느 곳에서 서로 마주친다. 내려오던 그 누군가가 올라가던 그 누군가를 웃으며 바라본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오던 그 누군가를 장난스럽게 가로막는다. 서로 마주친 그들은 위태로이 몸을 부딪혀 살포시 잠시 뒤엉켰다가 이마 위의 가벼운 입맞춤으로 헤어진다. 사방의 어디에서 바라보아도 충돌하는 계단들 위 열리지 않는 네 개의 「좁은 문」(2008)은 하나의 유사 무대장치로 익명적 사건의 발생을 더욱 견고하게 제시한다.

무대장치의 처음에는 「닫혀진 풍경」(2007)이 있었다.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목요일 풍경은 작업장의 각목, 페인트 통, 여러 도구들이 기대어 서 있는 장면들과 함께 네 면이 동일한 문과 틀 안에 이름 없이 갇혀있다. 작가는 이렇게 건너-공간beyond-space에서 일어났던 익명적 사건들을 닫힌 기억의 커튼에서 현재의 시간으로 복귀 시킨다. 하천 너머 산을 뒤로 유난히 검은 창과 하얀 벽을 가지고 있는 무대 같은 집이 있다. 유난히도 얇아 보이는 하얀 벽에서 종이 화분에 담긴 풀의 생장을 떠올린다. 화초가 살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고 물을 주면 종이 화분이 녹아내려야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진행되는 그 너머로의 운동(풀이 사는 집, 2008)은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아포리아aporia이다. 이 절치부심의 순간, 작가가 판단하기에 내용적으로 있지 않아야 할 개인의 심리적 불안이 반영되는지도 모른다. 지난 날 소리 없는 손짓으로 외쳤던 공허한 「안녕」(안녕!, 2006)은 원고지 위의 검은 공백들이 되어 다시 인사한다. 작가는 자신과 타인의 글들 가운데 그녀의 막에 상영된 글들의 첫머리를 따라 버려진 원고지의 빈칸들을 검게 메워 나간다. 때문에 동일해 보이는 출구 없는 검은 면들의 심드렁함과는 달리, 한 번 놓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수고를 해야 하기도 한다.

고단함을 잠시 뒤로하고 마주 닿은 네 개의 문이 등장했던 애초의 장치 하나로 돌아가 기억의 운동성을 들여다보자. 중첩된 문들은 벽이자, 동시에 충돌하는 기억이기도 하다. 기억들의 부딪힘은 바라보는 그 누군가에게 타인과 나의 기억, 내 안의 기억들, 현재와 과거와 미래 기억들로 재구성된다. 이 변주를 유발하는 풍경과 심리의 간극은 우발적이다. 계량화된 시간을 넘어서는 진행형의 우발성이라는 시간적 상태는 바닥에 한쪽 면은 닿아있고 다른 한쪽 면은 떠 있는 창문으로 놓여지거나(72*11, 2008), 모래 위 사선으로 꽂힌 반사 표지판(모래성, 2008)이 되어 깜빡인다. 창문과 반사 표지판은 공통적으로 정상적 운동성과 반대인 사고의 상황을 떠올리게끔 지표면과 기울어져 있다. 내달리던 트럭이 꼬리만 남긴 채 전시장 한 모서리에 꽂힌(1톤 트럭의 추억, 2008) 것처럼, 시간이 꼬인 듯한 이 장면들은 습관화된 기억의 방향으로부터 이탈하여 평온하지만 불안한 상태로부터의 구출을 시도하려 한다.

그러나 바깥과 통해야 할 창문은 유리 대신 중력에 의해 시멘트가 켜켜이 쌓여 있다. 깨알 같은 모래성이 반사 표지판을 가두고 있다. 탈출 시도는 번번히 기울어진 반사판을 비추고 있는 흔들리는 손전등만을 애처롭게 바라봐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장면은 다시 역전될 수 있다. 다모클레스는 수동적이나마 왕의 칼 아래에서 현실을 다시 보고 아첨꾼의 호화로움을 각성했다. 익명의 그 누군가를 머리 위에서 비추는 손전등은 순조로운 세상 너머의 모습을 각성하게 한다. 작업실 근처 길 공장의 길게 늘어선 셔터들이 그저 벽이었다는 풍경에 관한 오역이 만드는 배신감은 거울이 되어 관객에게 자기 반영에 도사린 함정을 말하고 있다. 자신 너머의 외부풍경들을 내부에 각인시키는 과정에서 내부와 외부의 침투 불능을 깨닫는다. 막을 만드는 세계의 구조 속에서 저항하는 한 개인은 외롭다. 그렇기 때문에 다모클레스의 칼 아래에서 익명적 이름을 원하는 그 누군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개인과 사회라는 지루한 단어들이 등장한다. 다시 말해, 시스템 안에서 선택에 직면하는 저항하는 개인은 일종의 저주와 숙명으로 읽히는 것이다. 사회문제 해결이나 공공의 선택을 개인의 선택으로 돌리는 이 세계에서 사건들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말을 하지 않는 그 누군가들은 말을 찾아 답을 내뱉을 수 있기나 한 걸까.

갤러리 한 켠 창문 너머로 바람을 낚는 낚싯대는 바닥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더 좁아지며 원근법을 배신한다. 길어보였던 자신과 대상의 관계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그리고 막을 형성했던 기억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촉매로 다른 기억들이 침투한다. 상투적 이름 없음이 아니라 이름이 망각된 익명성의 조각적 상황들은 거기에 매일 있었던 그 “이름 모르는 아이”를 인지하고, “저 너머 뭔지 모르는 것들, 다가갈 수 없었던” 그 길을 연다. 기록되지 못한 말 없는 풍경 속에서도 사건들의 질량차는 매 순간 기억되며 남아있다. 주택가 좁은 사이 어두운 방에서 새어 나오던 빛은 사면의 문으로 가로막힌 가운데 위 아래를 관통하는 밝은 빛으로 전환된다(좁은 문, 2008). 이렇게 연장된 시선의 이름으로 사건의 우발성은 지속될 수 있으며, 비로소 익명적 장면들의 풍경 되기가 실현되리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