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칸의 틈새 : □, ■, ▣ - 김민애의 전시「익명 풍경」을 보고

강정호_작가

세계는 □ 이다.

김민애는 빈 칸에 대한 독특한 존재론적 감수성을 지닌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는 빈 칸을 둘러싼 있음과 없음에 대한 물음으로 지탱되고 있다. 세계는 균일한 빈 칸으로 가득 차 있는 원고지처럼 그 사람 앞에 놓여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세계는 □ 1) 의 연속이다. 가운데 공간을 공백으로 비워두고 있는 □는 확고하게 존재하는 사물들. 즉 확실하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그 쓰임새와 명칭을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사물들의 총체이다. 또한 □는 거기에 닿는 주관적인 손길을 모조리 살균해 버리는 무균질의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 □는 다양하게 변주되며 이 세계의 물질적인 기틀을 다진다. 원고지, 창틀, 문짝, 셔터 문.. 등 수많은 사물들이 □을 이루며 그 사람 앞에 놓여 있다.
□에 대한 체험. 그의 삶이 그렇듯이 그의 작품도 □을 전재해 놓고 시작된다. 그런 까닭에 그의 전시장을 물질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뼈대는 □가 된다. 그의 작품을 대면하게 될 때 관객들의 감각에 최초로 와 닿는 것은 □가 지니고 있는 무균질의 물질성이다. 원고지, 창틀, 문짝, 셔터 문.. 등 □로 선택된 사물들은 견고하고 무관심하게 전시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그의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 가운데 둔감한 이들은 그러한 사물들의 무심한 외양만을 감상하다가 발길을 돌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감수성의 올과 결이 조금이라도 섬세한 관객들은 전시장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사물들이 미세한 균열과 같은 떨림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작가의 내밀한 존재물음은 바로 여기에서 움터 나온다. 그러한 떨림에 귀 기울인 관객들은 문득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가 불안하게 요동치는 ■로 바뀌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사람은 ■이다.

그렇다면 ■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를 채우고 있는 것들 - 흔들리는 연필자국, 기울어진 창틀 속에 굳어있는 시멘트, 흘러 넘친 흙더미가 바로 ■를 구성하는 사물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왜 □를 채우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세계는 그의 있음과 없음에 상관없이 □로 이미 주어져 있다. 그가 이 세계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의 어딘가에 자신의 위치를 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 속에 이미 내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과 같은 견고하고 무심한 사물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사람이란 존재는 사물이기도 하고, 사물이 아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를 이루는 사물들, 예컨대 원고지, 창틀, 문짝, 셔터 문, 등과 별 다를 바 없는 사물이긴 하지만, 그들만큼 견고하지도 무심하지도 못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의 바깥을 끊임없이 지향하는 있는 불안정한 사물, 요동치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견고하게 자리 잡은 □의 속을 불안정한 사물들로 채워 넣어 ■를 만들어 낸다. 그런 까닭에 ■는 □만큼 확고할 수 없다. ■는 자신의 내부에 미세한 떨림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떨림은 □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불안정한 사물들의 벡터2)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러한 벡터가 그리는 화살표가 □ 바깥에서 얼마만큼 한심하게 꺾여버리는 지는 작가가 이미 자신의 한 작품3)을 통해 쓸쓸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흔들리는 연필자국은 무의미한 낙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원고지를 필요로 하고, 시멘트는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 겉 틀을 필요로 하고, 흙더미는 쏟아지지 않기 위해서 용기(容器)를 필요로 한다. 불안정한 사물들은 □의 바깥을 지향하며 □ 속에서 요동치지만, □의 바깥에 사물이 사물로서의 형태를 유지하며 안정되게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떨림은 소심하게 흘러 넘친 한 줌의 흙뭉치나, 넘치지 않을 정도로만 낮게 기울인 창틀 속의 시멘트, 결코 거칠음에 이르지 못하는 미온적인 터치의 연필자국과 같이 체념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의 떨림은 □의 견고한 외곽 속에 답답하게 억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로 완전히 환원될 수 있는가?
하지만 이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일상의 공간 속에서는 한낱 연필자국, 시멘트, 흙더미로 쉽게 환원되고 말겠지만, 그 사람이 마련한 전시 공간 속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전시 공간에서의 그들은 그 사람의 모순적인 있음을 대변하고 있는 불안정한 사물들, 즉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를 불안하게 메우고 있는 ■이고, ■는 그 사람 있음 자체이다. 하지만 그 사람만 ■ 일까? 그 사람은 아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작가라는 명칭을 달고 전시장이라는 공적인 공간에 □과 ■를 동시에 배치해 놓고 관객을 맞이하는 이유는 자신이 재기하고 있는 존재물음의 보편성을 시험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은 견고하게 구성되어 있는 물질세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의 사물, 그러나 자신이 사물임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사물에 불과하다. 즉, 이 글에서 사용된 기호를 써서 간략화 시키면 사람은 □를 채우고 있는 ■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가 전시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명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그의 존재물음의 문제의식이자 출발점일 뿐 결코 해답이 아니다. 그의 존재물음의 핵심은 오히려 사람은 ■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으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역설에 담겨 있다. 그러한 역설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그는 자신의 전시 공간에 □과 ■이외의 요소를 하나 더 추가 시킨다. 그것은 ▣, 빈 칸의 틈새이다.

▣ : 빛, 바람, 비어 있는 거울

▣는 무엇인가? 그의 전시장을 직접 찾아가 보았던 사람에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척 간단하게 주어진다. 주의 깊은 관객이라면 그의 전시장의 공간이 이원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시장을 갈 수 있는 공간과 갈 수 없는 공간으로 나누어 놓았다. ▣는 관객이 갈 수 없는 공간에서 비롯된 모든 것들이다. 네 면이 문(門)들에 의해 봉쇄되어 있는 빛의 공간, 낚싯대에 걸린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창 밖, 바닥에 놓인 창틀의 빛이 새어 나오는 틈새, 셔터 문(門)에 의해 덮여 있는 거울 벽면4), 이 모든 것들이 전시장에 발을 들여 놓는 관객을 확장된 공간감으로 선뜻 놀라게 하는 동시에 단절된 피안(彼岸)을 접하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공간 체험으로 이끌어 간다. ▣는 빛이고, 바람이고, 비어 있는 거울이다. 그것은 인접한 피안으로 제시되었고, ▣는 한정된 대상이 아니라 초월된 공간으로서, 혹은 초월된 공간에 대한 암시로서 관객들이 발을 딛고 있는 전시장과 접속되어 있다.
작가는 아마도 피안이니, 초월이니 하는 낱말을 쓰는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지닐 것이다. 이런 낱말들이 작가가 작품 속에 애써 마련해 놓은 미세한 긴장감을 막연한 추상성으로 이완시켜버리기 때문이다. 그러한 손실을 피하기 위해 조금 더 소박한 낱말들을 사용하여 얘기를 진행시켜보자. 그 낱말은 틈새이다. ▣, 그것은 □과 ■ 사이에 나있는 이상한 틈새이다. 원칙적으로 □과 ■ 사이에는 틈새가 있을 수가 없다. 물질과 물질 사이의 연속성을 단절시키는 어떠한 비물질적인 틈새가 허락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 ■ 사이의 구별은 사람이라는 사물의 불안정한 떨림에 특권을 부여했을 때에만 가능할 뿐, 사람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일 뿐이다. 빛도, 바람도, 거울도 모두 □에 속한다. 작가 또한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 그들을 전혀 신비화시켜 놓지 않았다. 특히 빛을 뿜어내는 헤드라이트의 사물성은 얼마나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가. 그들은 단지 관객이 갈 수 없는 곳에 놓여 있을 뿐이다.
작가는 연필자국, 시멘트, 흙더미로 □를 채워서 ■을 만들어 내었듯이, 이번에는 네 면을 봉쇄하고 있는 문짝, 거울 위에 내려진 셔터, 바람개비가 드리워진 창문으로 사람의 육체가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 냄으로써, □속에 ■가 닿을 수 없는 공간인 ▣을 만들어 낸다. 사실, ▣는 사람이 사물로서 지니는 한계인 육체에 물리적인 테두리를 침으로써 생겨난 공간이지, 어떠한 형이상적인 피안(彼岸)도 초월적인 공간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별다른 모순점을 찾을 수 없는 물리 공간에 이상한 틈새라는 묘한 명칭을 붙이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일까?
우리는 여기서 물질세계에 순응하듯 차분하게 □속에 가라앉아 있는 작품들이 은밀하게 공모하고 있는 반전(反轉)을 눈치채야 한다. 이 반전은 철저히 인간을 위한 것이다. 네 면을 봉쇄하고 있는 문짝, 거울 위에 내려진 셔터, 바람개비가 드리워진 창문... 그들은 과연 어떠한 목적으로 빛과 바람과 거울 속에 비친 관객의 모습을 전시장에 발 딛고 서 있는 관객들의 육체로부터 물리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일까?
■를 구성하였던 연필자국, 시멘트, 흙더미와는 달리 ▣를 의미하는 빛과 바람과 거울 속에 비친 관객의 모습은 자신이 지닌 물질성과 대상성을 확인하는 것을 관객에게 금지시키고 있다. 그들 또한 물질세계에 속한 사물임이 분명한 듯하지만, 그러한 결론은 강제적으로 유보된다. 관객은 빛이 발원되는 헤드라이트, 바람을 품고 있는 바람개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나타나는 물질성과 대상성에 대해 너무나 당연한 확신을 가질 테지만, 그 확신은 굳어지지 못한다. 헤드라이트는 네 개의 문짝에 의해 견고하게 봉쇄되어 있고, 바람개비는 장대에 의해 관객의 손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에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관객의 모습은 거의 무릎께까지 내려온 셔터 문에 의해 굳게 차단되어 있다. 즉 그들의 물질성과 대상성에 접근하는 것은 □을 이루는 사물들에 의해 견고하게 차단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보호된 여건 속에서 빛과 바람과 거울의 반사면은 자신들이 갇혀 있던 물질성과 대상성의 한계에서 문득 벗어나게 되고, 그들은 전시장의 갈 수 없는 곳과 갈 수 있는 곳을 넘나들며 전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물질세계의 무심한 견고함에 균열을 일으킨다. 물질세계의 충실한 구성원인 듯한 문짝과 셔터와 창문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견고함으로 빛과 바람과 거울의 반사면이 지니는 반(反)물질적인 성격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는 이상한 틈새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가 □에 균열을 일으키는 아이러니한 반란의 공간이다. 그 장소에선 연필자국과 시멘트와 흙더미가 자신의 사물성을 무한히 유보해버리고 빛과 바람으로 변신할 수 있고, 바라보는 대상이 비워져 있는 거울의 반사면에서와 같이 물질세계의 견고한 일원성이 손쉽게 용해될 수 있다.
사람은 ■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으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작가의 역설적인 존재 물음은 ▣라는 기묘한 해결책으로 나아가서, 사람은 이제 □에 의해 견고히 보호되고 있는 헤드라이트이자 바람개비이자 거울 속의 반영(反影)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사물성과 대상성은 너무나 뻔하게 드러나는 것이지만, 결코 확인할 수도 없는 것이고 확인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작가는 □과 ■ 사이에 나 있는 틈새를 초월적인 피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을 접근 금지의 지역으로 만듦으로써 사람의 있음의 위태로운 떨림이 그 모순적인 성격 그대로 수용될 수 있는 역설적인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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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빈 칸이란 말의 뉘앙스가 좁고 한정되어 있으므로 좀 더 포괄적인 느낌을 담을 수 있는 이 기호를 쓰도록 하자.
2) 개체 내부의 긴장에서 생기는 일정한 방향의 추진력
3)「모래성」이란 작품
4) 이 거울 벽면은 아래쪽만 거울로 트여 있어 아주 가까이 가지 않는 이상, 보는 사람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 보는 사람이 이미지가 가려진 채 지면을 타고 뻗어나가는 반사 공간은, 환영적인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환영임을 확인할 수 있는 표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묘한 실재감을 확보한다. 이처럼 환영과 실재를 교란시키는 반사 공간은 전시장에 설치된 다른 작품들의 견고한 물질성 또한 미묘하게 흔들어 놓는 역할을 한다.